김규항의 블로그를 보던 중, 자신의 문체에 대한 비평을 언급한 글 (김규항, GYUHANG.NET)을 발견하고 흥미를 느껴 거슬러올라가 찾은 발원지(?)이다.
로쟈, 문체, 혹은 양파에 대한 생각
김훈에 대한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다음 부분은 특히 사람들이 김규항의 글을 읽으면서 많이들 느끼는, 어떤 거부감의 근원에 대해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듯하여 시사적이다.
‘자객식’으로 말하자면, 사실 “살겠다고 버둥거리는 놈들”은 전부 보수주의자이고, “죽지 못해 안달인 놈들”이 진보주의자이다. 유기체의 생존은 ‘항상성(호메오스타시스)’이라는 걸 조건으로 한다. 항상성이란 건 ‘기브 앤 테이크’, 즉 주고받는 타협을 통해서 유지된다. 단칼에 자결하지 않고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는 일은 언제나 그러한 ‘타협’을 전제로 한다. 그것이 인간조건이다. 그럴 경우, 급진적인 진보주의 혹은 절대적 진보주의(‘숭고한 A급 좌파’란 게 있다면)란 그러한 타협과 인간조건으로부터의 ‘단절’을 뜻한다. 즉, 결코 타협하지 않으며, 죽음을 무릅쓸지언정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것(지젝 같은 좌파가 ‘죽음충동’에 그토록 매혹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당연하다. 그에게 유일한 ‘행위(act)’는 상징적 ‘자살’이다). 지젝과 네그리 같은 좌파들은 모두 기계-인간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바, 그것은 현재의 인간조건이 극복되어야지만 진정한 ‘진보’가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김규항도 그러한지?)
이런 주제에 대하여 흥미를 갖고 있는 분들께 일독을 권한다.
시대 1.
나는 당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견해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 편에 서서 싸우겠다.
(I may disagree with what you have to say, but I shall defend, to the death, your right to say it.)
18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의 말이다. (사실 볼테르 자신이 이 경구를 직접 언급한 적은 없다지만... 건더기, 볼테르 좀 그만 팔아먹읍시다... 참조)
시대 2.
"처음에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잡으러 왔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잡으러 왔습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유태인을 잡으러 왔습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 그 때는 나를 위해 저항해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나치 독일에 의해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독일 루터교 목사 니묄러의 말이라고 한다.
시대 3.
6월 1일 새벽, 경찰은 효자동길, 삼청동길 어귀에서 밤새 물대포에 젖은 시민들에게 방패와 몽둥이를 휘둘렀다. 우리가 20년간 피땀흘리며 조금씩 어렵게 쌓아온 절차적 민주주의가 불과 3개월만에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자정을 기해 효자동길을 떠났던 나는 다음날 아침 밤새 일어난 일을 접하고 내가 80년대로 도로 날아온 것은 아닌지 내 눈과 귀를 의심해야 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두렵게 만들었나. 자발적으로 모여든 맨손의 시민들이 외치는 외침이었을까, 아니면 주일 아침 장로님이 교회를 향해 지나가실 길에 행여나 그들을 보았을 때 떨어질 질책이었을까. 시민들은, 그리고 아이들은 화염병을 들지도, 쇠파이프를 휘두르지도, 돌을 던지지도 않았다. 밤새 물대포를 맞고 추위에 떨며 맨주먹으로 구호를 외쳤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경찰의 욕설과 방패와 몽둥이와 군화발이었다. 그렇게 머리가 깨지고 고막이 터지면서, 시민과 아이들은 경찰의 짐승몰이에 쫓기기만 할 뿐이었다. 할 수 있었던 건 "비폭력"을 외치고 "때리지 마세요"라고 절규하는 것 뿐.
대학 초년병 시절, 지하철파업과 연대사태와 노동법 개악 반대투쟁 등을 거리에서 겪으면서 나름 큰 집회와 시위들을 보아왔지만, 이처럼 조직도 체계도 없는 시위는 본 적이 없다. 그런 것이 있었다면 그렇게 속수무책 당하면서 우왕좌왕하고 있었겠는가. 아직도 배후세력 운운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이틀간 내가 거리에서 보았던 "배후세력이 조종하는 불법시위"의 진실이다. 사진 속 피흘리는 아이의 두려움 하나 없이 맑은 눈망울이야말로, 진정한 승자와 패자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리라.
이러한 상황을 진실로서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현 정권의 이런 폭압 - 그것이 의료보험 민영화든 비정규직법 개악이든 공기업 사유화이든 - 은 언젠가 내 머리 위에도 떨어질 수 있고 또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더 이상 편안히 앉아 있어서는 안된다. 협상결과에 대한 찬반과 정권에 대한 지지여부를 떠나,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주권재민의 원칙이 마저 압살당하기 전에 거리로 나와주길 간절히 바란다. 의자에 앉은 채 모니터 너머 벌어지는 유혈의 현장을 지켜보며 분개하는 것만으로는 더이상 얄팍한 자존이 만족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지금 이 순간도 거리에서 정권의 군홧발에 피흘리는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비록 아이들과 시민들이 외치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누구에게도 맞지 않고 자신들의 주장을 말할 수 있도록, 함께 싸워주십시오.
아웃사이더가 계속 나오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나 자신의 개인적 취향에 극히 맞는 글을 쓰는 소수의 지식인 중 김규항, 진중권을 한꺼번에 거기에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노자와 홍세화까지, 이 얼마나 다양한 종합 선물세트인가 ㅎ) 앞으로 태어나고 자랄 내 아이에게 <고래가 그랬어>를 읽히고 싶은 마음은, 어쩌면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물론 그때까지 <고래>가 계속 나온다는 전제에서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고, 또 그래야만 한다.
- 말리
광활한 대지는 모든 종족들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그 어머니를 혼자서 독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종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위대하고 강인한 꽝탄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가 하면, 태어나면서부터 눈치를 보기 시작해,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눈치를 보며 살아야하는 종족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아무렇게도 일컫지 않았지만, 위대하고 강인한 꽝탄족의 왕,
그러니까 와꾸파챠의 아버지 도꽈르타 왕은 그들을 "천하에 쓸모도 없는
종족"이라 불렀습니다.
잡혀 먹히는 일 외에는 가치가 없는 종족이라고 말입니다.
시킬 수 있는 일은 그야말로 별 필요도 없는 보리부스러기나 경작하는 게
전부였고, 언제나 우월한 꽝탄족 앞에서 목숨을 구걸하는 나약한 존재들
이었기 때문입니다.
와꾸파챠의 아버지 도꽈르타 왕의 취미는 하루에 하나씩 그 종족을 사냥해
잡아먹는 일이었습니다.
얼마나 재빨리, 얼마나 폼나게, 얼마나 잔인하게 잡느냐가 명예를 세우는 하나의 척도였으니까요.
그러나 아버지 도꽈르타 왕이 죽고 계승왕이 된 와꾸파챠의 생각은 달랐습
니다. 와꾸파챠는 그들을 "천하에 쓸모도 없는 종족"이라고 부르지 않았습
니다.
아, 물론 어릴 적에는 그랬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렇게 부를래야 불러
지지가 않았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쩝쩝 고기를 뜯어먹지 못하지만, 그들은 싱싱한 야채를 오물오물 씹어 먹
습니다.
농사를 짓지 않는 때면 그들은 노란 벌판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상한 소
리들을 냈습니다.
와꾸파챠 일족의 거대한 성으로 흘러 들어오는 그 소리를 아버지 도꽈르타
는 욕에 욕을 하며 진력을 내곤 했지만, 와꾸파챠는 몰래몰래 훔쳐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 느낌을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가슴 부위가 간지럽고, 다리에 힘이 빠지고, 어깻죽지가 떨리는 이상한 느
낌이었습니다.
그 연약한 종족은 자신들의 그 이상한 소리를, "노래"라고 불렀습니다.
와꾸파챠는 왕이 되어서도 그 나약한 종족을 숨어서 훔쳐 보았습니다.
그들의 손은 사냥을 하기엔 너무나 작고 볼품 없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눈은 이상할 정도로 크고 검습니다.
그런 눈은, 사냥을 하기엔 겁이 많은 눈이니까 네, 쓸모없습니다.
그들의 몸집은, 또한 사냥을 하기엔 부적절하게 길고 유연했으며, 사냥을
하기엔 너무 연약하고 보드라운 살집과 털로 뒤덮여 있습니다.
와꾸파챠는 그들을 먹어본 적은 있지만, 제대로 만져본 적은 없었습니다.
이상했습니다. 만져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종족은 와꾸파챠의 모습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후다닥 어느 구석
으로 달아나, 고개만 내밀고 이 쪽 눈치를 보는 통에 도무지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냥을 해서 억지로 움켜잡을 수는 있겠지만, 왠지 와꾸파챠는 그게 마음
에 들지 않았습니다.
......와꾸파챠는, '다가가서' '응시하고' '만져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와꾸파챠는 짝짓기를 할 시기가 되었습니다.
항상 위험한 사냥과 경쟁에 몰두하는 왕족은 형제들을 금방 잃어버리기
십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계승자를 많이 생산해 내는 것은 왕족의 의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왜일까요?
짝짓기 상대로 나타난 자신의 일족들에 대해 와꾸파챠는 심드렁했습니다.
혼자서 살쾡이 다섯 마리를 먹어치운다는 망구치바에게도, 매서운 발톱으로
작은 고기를 마흔 아홉 조각으로 도륙낼 수 있다는 푸타카치에게도, 꼿꼿한
털로 무장되어 그 기운이 주변을 제압한다는 용맹한 찌판추탄에게도…
와꾸파챠는 호기심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와꾸파챠는 말랑밀렝이 궁금했습니다.
…말랑밀렝.
말랑밀렝은 그 "쓸모없는 종족" 중에서도 가장 조그만 아이인데도 말입니다.
그 아이는, 그네들 안에서 '가수'라고 불렸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 종족은 말랑밀렝의 노래를 들으며 울기도 하고,
신이 나서 깡총깡총 춤도 추곤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말랑밀렝은 이름조차 노래 같았습니다.
와.꾸.파.챠.라는 자신의 이름을 중얼중얼 되뇌어보면, 괜히 뭔가를 부숴버리
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데, 말랑밀렝말랑밀렝말랑밀렝..그 이름을 중얼중얼 되
뇌어보면, 노래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와꾸파챠도 어느새 노래를 하고 있는 듯
했고 기분이 편해졌습니다.
와꾸파챠는 말랑밀렝의 노래를 들은 적이 종종 있습니다.
말랑밀렝은 초록풀이 자라는 언덕배기에서 혼자 저 산 저 편을 바라보면서 노
래를 하곤 했습니다.
와꾸파챠가 껑충 뛰어 낚아채면 돌아볼 새도 없이 잡혀 버렸을텐데도 말랑밀렝
은 주변엔 아랑곳없이 보드라운 털을 바람에 날리며 혼자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노래는 말입니다.
마치 산들바람에 푸르르 떠는 연두빛 나뭇잎들의 수선거림 같았습니다.
기묘하고 가늘고 높이, 그리고 한없이 낮게, 지르르 떨리는 음율이었는데, 그
노래를 들으며 와꾸파챠는 차마 숨도 못 쉬고 바위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지치지도 않았는데 잠이 들었으니까요.
말랑밀렝은 그 일족 중에서 가장 조그맣기도 하지만, 가장 연한 다갈색 털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서 잠을 자는지 찾아내는 것
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말랑밀렝의 그 다갈색 털은 수풀 속으로 스며들어 버리기 때문에 어지간히 집
중을 하지 않으면 바라볼 수가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와꾸파챠는 어느 순간부터 그 조그만 휘파람같은 말랑밀렝을 잘 찾아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사르륵, 벌판에 부딪히는 작은 바람소리 사이로, 갸냘프고 구슬픈 노랫가
락을 좇다보면, 거기엔 항상 아름다운 말랑밀렝이 있었으니까요.....
* * *
언제부턴가 "위대하고 강인한 꽝탄족"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계승왕 와꾸파챠의 자질을 놓고 말입니다.
누구보다도 잔혹해야 하고 누구보다도 정력적이어야 할 꽝탄족의 왕이 짝짓기
에도 관심이 없고, 사냥에 앞장서지도 않을 뿐 아니라, 나약한 종족들 앞에 무
서운 표정의 얼굴을 가끔 보여주는 일조차도 극도로 꺼렸기 때문입니다.
들리는 말로는, 이 이상한 왕은 하염없이 아무것도 없는 들판을 바라보곤 한다
고 합니다.
또 들리는 말로는, 훌쩍 혼자 어디론가 나가곤 하는데 글쎄, 사냥을 하는 것도
아니랍니다.
이상한 소리를 웅얼웅얼거리면서 돌아오곤 한다는데, 그건 꽝탄족들이 그토록
질색을 하는 "노래"였습니다.
그 외에도 아무래도 미쳤지 싶은 증세가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불만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위대하고 강인한 꽝탄족"은 그 힘을 증명할 수 없으면 이미 꽝탄족이 아니었
습니다.
하지만 섣불리 이 미친 왕 와꾸파챠에게 도전하는 자는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계승왕이란, 어린 시절부터 모든 왕족의 사냥기술을 전수받은
제 일인자이기 때문입니다.
미쳐서 웅얼웅얼거리고 다닌다해도, 어린 시절부터 갖추고 있던 그 잔혹한
힘을 잃어버린 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불길한 분위기가 며칠 가지 못해서, 전왕 도꽈르타의 서자인 카보라치가
자신의 이복형인 왕 와꾸파챠를 기습했다는 풍문이 돌았습니다.
꽝탄족들은 흥분했습니다.
카보라치라면, 서자이지만 그래도 꽝탄족의 제 이인자가 아닌가!
언제나 음모를 꾸미는 듯한 얼굴을 갖고 있는 카보라치였습니다.
꽝탄족들은 예견된 기습이라는 듯, 자못 결과를 궁금해 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도는 풍문은..왕 와꾸파챠가 자신의 이복동생 카보라치의 얼굴을
일격에 내리쳐, 목뼈를 바스러뜨려 죽여버렸다고 합니다.
꽝탄족들은 또 흥분했습니다.
그래, 봐라..미친 왕이긴 하지만, 힘으로썬 당할 자가 없단말이다.
그가 왕일 수 밖에 없다!
모두들 수긍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얼마 뒤에 덧붙여진 풍문이 또 있었습니다.
목뼈를 바스러뜨려 죽인 자신의 이복동생 카보라치 앞에서 왕 와꾸파챠가
이상한 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부릅뜨고 있어야 하는 그 부리부리한 눈이 빨갛게 변하면서 훌쩍훌쩍
흐느껴 울었다는 겁니다. 울다니. 젖 달라고 보채는 어린애들에게나 용납될만한 그런 짓을 하다니요.
자신을 공격한 적을 안고 엉엉 울다니요.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꽝탄족들은 또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몇가지 꽝탄족으로서는 답답한 변화들이 있었습니다.
단지 그것은 아주 조금씩 조금씩 조여드는 동앗줄같은 것이라서, 엇, 하고
눈치를 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변화가 많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깨
닫는 형국이었습니다.
언젠가 재미로 하는 사냥을 금지한다는 미친 왕의 포고가 있었지요.
더구나 다른 종족들을 겁주는 일도 금지되었더랬습니다.
강제하진 않겠지만, 육식을 줄이고 채식을 장려한다는 포고도 있었군요.
정말 원래도 미친 왕이었지만 가면 갈수록 미쳐가는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들썩거리던 불만들도 제 1인자의 권위 앞에서 투덜거리며 덮여진지
오래였습니다.
훗날, 이 미친 왕 와꾸파챠의 시대는 열정적인 역사가들에 의해 이렇게
기록됩니다.
[꽝탄족의 역사서: 와꾸파챠 왕의 시대는 한마디로 맥 빠지고, 기력을 잃은
노인의 한숨같은 시대였다. ]
[다른 종족의 역사서: 유사 이래로 만끽하지 못했던 평화의 시대였다. 많은
종족들이 이 꽝탄족의 돌연변이 왕 와꾸파챠를 연구해왔다]
* * *
세월이 다시 많이 흘렀습니다.
이제 와꾸파챠 왕은 자기 종족의 역사서에서 비유한 그 시대의 모습대로,
자신도 노인이 되었고 죽음을 맞을 시기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미치고 늙은 와꾸파챠 왕은 자식도 없었습니다.
짝을 지은 적도 없는데 자식이 없는 것이 당연하지요.
꽝탄족들은 그의 유언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꽝탄족의 왕은 숨을 거두기 전에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유언을 두 가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전통적으로 후계자 지정과 사냥터 상속의 내용이었지요.
하지만 역대왕들 중에는 항시 괴짜가 있게 마련이어서 가끔 별난 주문을 하는
왕들도 있었습니다.
입에 넣으면 바로 녹아버릴 정도로 연한 살코기를 구해오라는 둥, 수명을 두
배로 연장시킬 수 있는 불로환을 만들어오라는 둥…
이 미친 왕도 왠지 불안한 구석은 있지만, 자식도 없는 와중에 그런 희한한
주문을 하겠느냐며 꽝탄족들은 서로를 안심시켰습니다.
자, 이제 노환이 든 와꾸파챠의 주변에 유언집행자들이 둘러쌌습니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이 늙은 왕의 굳게 다문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망연히 침대 한구석을 먼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와꾸파챠 왕은, 마치 막혔던
숨을 토하듯이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작고 작은 아이, 말랑밀렝을 만나고 싶다고….
뭐라구??! 유언집행자들은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져 버렸답니다.
역시 미친 왕이다! 죽기 직전까지도 이 왕은 이상하다! 우리도 미쳐버리겠다!
작은 아이 말랑밀렝을, 다치지 말고, 세게 움켜잡지도 말며, 무서운 표정도
보이지 말고, 공손한 말투로, 마치 가득 찬 물컵을 조심스레 옮기듯 그렇게
자신에게로 데려와 달란다.
아니, 만일 말랑밀렝이 거절한다면 빈 손으로 돌아와도 좋다. 분명히 그렇게
말했지?
왜 그러는걸까? 저 왕은 왜 저러는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주문에 제 주먹을 물어 뜯으며 복잡해하는 유언
집행자도 있었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꽝탄족의 제 일인자, 노왕의 첫번째 유언이었으니까요.
꽝탄족은 그 '쓸모없는 종족'의 장로에게 왕의 유언을 알렸습니다.
왕의 주문과는 달리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며 벌겋게 부릅뜬 눈으로
말이지요.
물렁물렁인지, 말랑말빵인지를 빨리 갖다 바치라고.
안 그러면 재미없을거라고.
천하에 쓸모없는 종족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장로는 나이답지않게 엉엉 울면서 말랑밀렝에게 애걸하듯 말했습니다.
당신이 안가면, 우리 종족은 씨가 마를 것이다. 우리 모두를 봐서 지혜로운
결심을 내려달라고…..
....보십시오.
말랑밀렝입니다.
역시 누구에게나 공평한 세월은, 말랑밀렝을 혼자 놓아두고 달리지는
않았지요.
예쁘고 사랑스런 노래를 부르던 말랑밀렝도 어느덧 노인이 되었네요.
연하고 연하던 다갈색털은 더욱더 연해져, 마치 투명한 듯, 흰 듯 더욱
그녀를 조그맣게 보이게 합니다.
검고도 커다래서 겁먹기 쉬워 보이던 그 눈은, 알 수 없는 깊이를 더한 채
왠지 슬퍼보이는군요.
그녀는 말합니다.
네, 가겠습니다.
하지만 전 그들의 협박 때문에 가는 것도, 여러분을 위해 가는 것도
아니랍니다.
저를 종족을 구한 말랑밀렝으로 기억하진 말아주세요.
저는 항상 가고 싶었던 곳에 조금 늦게 가는 것이랍니다.
그러니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건 여러분 안에 증오를 키우진 마세요.
와꾸파챠왕을 미워하진 마세요.
그런 수수께끼같은 말을 마치고 말랑밀렝은, 꿈틀거리는 근육을 으시대는
세명의 유언집행자들 사이에 묻혀 종종거리며 늙은 왕에게로 떠나는 것이
었습니다.
그렇다면 산 채로 꽝탄족 왕의 성에 들어가게 되는 첫번째 종족이로군요.
작은 아이 말랑밀렝은.
* * *
땀에 절은 거대한 침대에 그 지친 몸을 누인 와꾸파챠왕의 앞에
말랑밀렝이 조그맣게 섰습니다.
유언집행자들은 왕의 손짓으로 일찌감치 쫓겨나 버렸지요.
말랑밀렝은 들어올 때부터 자신을 놓칠세라 좇는 늙은 왕의 부릅뜬 검은
시선을 한 몸에 받아내고 있었습니다.
거기엔 세월만큼 무겁고 응축된 침묵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선은..익숙한 시선이었습니다.
……………..
터질듯한 긴장감에 말랑밀렝이 먼저 말을 꺼냅니다.
.....제가 말랑밀렝입니다.
늙은 왕이 흠칫, 그 말 잇습니다.
.....아, 난, 난…와꾸파챠요..
말랑밀렝은 약간 우스워졌습니다.
.....왕이여, 넓은 어머니 대지 위에 사는 종족들 중에 당신을 모르는 종족은
없답니다.
그 말을 듣지도 못한 듯, 왕은 다급히 이어 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주면 좋겠소? 내게는 또 하나의 유언이 있다오!
말랑밀렝이 말합니다.
.....왜 제게 무언가를 주려고 하십니까?
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또 한참을.
다시 침묵을 안은 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말랑밀렝은, 그 작은 가슴 속에
와꾸파챠의 세월만큼이나 깊이 묻어뒀던 질문을 꺼냅니다.
.....당신은 왜 절 그렇게 지켜보았지요?
그 질문에 와꾸파챠는 놀라, 쏟아내듯 말을 잇는 말랑밀렝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만 봅니다.
.....처음엔 당신이 날 사냥하려는 줄 알았지요.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그 큰 몸을 내가 수풀로 봐주리라고 생각하는지
잔뜩 웅크린 채, 항상 제 노래를 들어주곤 했다는 걸..전 알게 되었지요.
와꾸파챠 왕은 놀란 표정으로 더듬더듬 묻습니다.
.....말랑밀렝, 당신은 그럼 내가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내가 무섭지 않았던
거요?
말랑밀렝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합니다.
.....모르는군요. 와꾸파챠 왕이여.
어느 순간부턴가 저는 당신을 불러내기 위해 노래하고, 내 곁의 당신을
느끼면서 노래하고 있었다는 것을.
왜 당신은 항상 내 뒤에서 바위처럼 웅크린 채, 한번도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지요?
왜 항상 외롭고 쓸쓸한 표정으로 돌아가곤 했던거지요?
제가 여기 온 이유는 그 대답을 듣기 위해서이고…또…이젠 쓸쓸하게
혼자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는 것을 말씀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저런, 꽝탄족의 늙은 왕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네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늙은 와꾸파챠는 소리를 내지 않고 끅끅 굵은
눈물만 흘립니다.
말랑밀렝이 말합니다.
……..와꾸파챠여, 지금 나에게 바라는 무엇인가가 있나요?
당신이 내게 무언가를 주고 싶듯, 나 역시 당신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다는 것을 이제 아셨으니 그것을 먼저 들려주길 바래요.
왕 와꾸파챠는 큰 안도와 기쁜 한숨을 푹 토하며 말합니다.
……..가까이서, 당신을 만져보고 싶다오. 당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내 눈이
좇던 그 말랑밀렝을 내 손으로 확인하고 싶다오.
말랑밀렝이 말합니다.
……..기꺼이, 그렇게 하시길.
왕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합니다.
……..나는 무엇인가를 살며시 만지는 데 익숙치가 않다오.
내 손은 우악스럽고 당신은 솜털같은데 ….
말랑밀렝이 말합니다.
………와꾸파챠여. 우린 둘 다 늙었습니다. 서로가 바라는 것 한가지는 해 줄
수 있을만큼 나이를 먹었답니다.
와꾸파챠는 젊은 시절 자신이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그 행동을 허락받았습니다.
'다가가서' '응시하고' '만져볼 수' 있는 기회를요.
침대에서 무겁고 병든 몸을 힘들게 일으켜...다가갑니다.
애처롭도록 작고 예쁜 말랑밀렝에게로..한걸음, 두걸음..
모든 것을 수용하려는 듯한 미소로, 높고 큰 와꾸파챠를 놓치지 않고 바라보는
말랑밀렝에게로 다가갑니다.
커다란 몸을 넘어질세라 신중하게 앞으로 숙입니다.
그리고 손을 내밉니다. 조심조심…
자칫 할퀼세라, 굵고 날카로운 발톱을 잔뜩 모아쥐고..조심조심..
아,……닿았습니다! 부드럽고 가녀린 말랑밀렝입니다! 부드럽고 가녀린..!!
와꾸파챠의 몸이 온통 떨리기 시작합니다.
터져 부셔지듯 뭔가 외치고 싶었습니다.
머리 속에서, 가슴에서 정신없이 외치고 싶은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외쳐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하죠?!
그 북받치는 행복감이, 그 북받치도록 안타깝고 벅찬 감동이 가슴을 타고,
심장을 타고, 식도를 타고, 혀를 태우며!!!!!! 어떻게?! 어떻게???!!!
!!!!!덥썩!!!!
...................물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늙은 왕 와꾸파챠는 작은 말랑밀렝을 그렇게 어이없이 덥썩 물어 죽였습니다.
* * *
유언집행자들이 들어왔을 땐, 제 심장을 스스로 깊이 도려낸 와꾸파챠왕의
가슴팍에, 한 입에 숨통이 끊어진 그 '쓸모없는 종족'의 말랑밀렝이
얹혀진 채 죽음이 그 방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아연실색한 꽝탄족들은 이렇게 괴이하게 죽은 미친 왕이 죽기 전에 쓴
두번째 유언을 읽습니다.
모든 종족들을 위협하던 꽝탄족들은 이제 모든 종족을 보호하는 꽝탄족
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유언을 말입니다.
* * *
다시 무심한 세월이 흐릅니다.
와꾸파챠와 말랑밀렝의 이야기는 가물가물 뒤로 멀어지는 기억 속으로
잠겨갑니다.
대부분이 예전과 같아졌지만, 어떤 것은 예전과 다르고, 예전과 같아
보이는 것들도 그 안에는 미묘한 차이를 띠고 분주히 시간을 따릅니다.
대지의 어머니가 사계절의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죽음이 있듯 생명이
있고, 종족들의 갈등이 있듯 또 다른 와꾸파챠와 말랑밀렝이 있기도
했답니다.
무정한 것이 세월이라 했지만, 서로에게 서툴렀던 와꾸파챠와 말랑밀
렝의 그 '간격'은 조금씩 조금씩 다가서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는
종족은 별로 없었습니다...
단지 종족들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어머니 대지만이 미소 띈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
그런데,.....이 이야기를 끝내기 전에 여러분께 묻고 싶은 말이 있군요.
과연 말랑밀렝이 와꾸파챠에게 듣고 싶었던 그 대답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와꾸파챠가 몰랐던 그 대답은, 알았다면 그렇게 덥썩 물어버리지
않았을 그 표현은 무엇이었을까요?
제 생각엔, 누구나 듣고 싶고, 누구나 하고 싶은 그 말인 것 같군요.
...
.....여러분께 그 말을 드릴께요.


